오는 수요일은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일입니다. 사전투표율이 무척이나 높았습니다. 그중 재외국민투표율도 상당했습니다. 그만큼 나라의 앞날을 좌우할 중요한 일이라는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인식 때문인듯 합니다.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이다”라는 말의 의미는 선거 참여, 즉 국민주권 행사를 통해 민의를 적극적으로 전달해야 함을 얘기합니다. 크리스천들도 이같은 권리와 의무에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흔히들 “교회에서는 정치적 발언을 하면 안된다” “교회는 하나님만 예배하는 곳이지 세상 이야기를 하는 곳이 아니다” “교회에서 정치적 이야기를 하면 서로 얼굴 붉히게 되니 될 수 있는대로 하지 않는게 좋다” 등 교회 내에서의 정치적 발언을 금하는 입장의 저변에는 ‘정교분리’의 원칙이 있습니다. 이는 ‘정치가 종교를 억압하거나 또는 종교가 정치에 관여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정교분리’는 “종교와 정치는 양자 간에 엄격한(분리의)벽이 있다”고 주장한 미국의 제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의 견해에서 출발하였습니다. 그는 당시 다음과 같은 3가지 중요한 원칙을 미국 헌법에 규정하였습니다. (1) 정치는 교회의 활동을 관여하지 말 것, (2) 정치는 교회에 해가 되는 법을 만들지 말 것, 그리고 (3) 정치는 교회에 세금을 부과하지 말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시작은 세속정부로부터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함이지 교회의 정치적 참여를 금지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교회를 정치로부터 보호하고자 했던 그 원칙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점점 교회를 정치로부터 고립시켰고, 어느덧 크리스천들의 정치적 무관심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를 현실과 동떨어지게 만들고 투표를 통해 사회 문제에 대해 우리의 성경적 관점과 이해를 전달하는데 적극적이고 능동적이기 보다는 지극히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게금 부추겼습니다.
특별히 한국사회는 과거 급속한 경제성장과 맞물려 벌어진 정경유착과 같이 1970-80년대 교회 성장과 부흥 시기에 정교유착(?)이 이뤄지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한국 주류 기독교는 親정부, 親기업 성향 아래, 정치적으로도 보수적 태도를 취합니다. ‘신앙적 보수=정치적 보수’의 도식이 그들의 인식 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반면 이 당시 소위 ‘민주화 운동’ 속에서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기독교는 이들에게 ‘진보적’ 기독교로 간주됐고 ‘좌파’라고 왜곡되었습니다.
정교분리에 대한 이해가 보이는 차이는 이와 같은 혼란스런 역사의 부정적 흔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은 과거와 반대로 보수적인 성향을 보이는 크리스천들이 보다 정치참여를 독려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사안에 대해 종종 정치적 행동을 불사합니다. 심지어 공론의 장에서 종교적 언어인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외칩니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집단 시위를 시도합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의 행동은 이기적이고 이중적인 위선으로 보여 종종 교회 전체가 사회의 지탄을 받은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 여부를 기준으로 진보와 보수 성향으로 구분될 수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크리스천 역시 이 땅의 시민 중에 한 사람으로서 현실 정치와 결코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크리스천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 땅의 백성으로서 정치에 적극 참여해야 합니다. 이 세상이 좀 더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되도록 우리들이 기여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딤전2:1-2).